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일 제국 (문단 편집) == [[독일 제국군|군대]]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독일 제국군)] > 아무 의미 없는 [[프랑스]]의 이상주의: 자유, 평등, 그리고 박애에 대하여, >우리는 세 개의 독일적인 현실주의: 보병대, 기병대, 그리고 포병대로 대응한다. >---- >[[베른하르트 폰 뷜로]] 존속 당시 독일 제국군은 단일 군사집단으로는 유럽 최강의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다. 육군은 유럽 최강이었고 해군은 영국 다음 가는 2위였다. 독일 제국이 이렇게 강력한 군사력을 건설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독일이 유럽에서 손에 꼽히는 인구와 으뜸 가는 산업력을 지니고 있었고[* 실제로 1차 세계 대전 직전 무렵, 독일의 각종 경제 지표는 영국을 거의 따라잡거나 심지어 능가하기까지 했다! 보다 자세한 사항은 옆의 링크를 참조. [[http://todayhumor.com/?humordata_1962828|#]]] 거기다 강력한 [[군국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독일 제국의 경제력은 대영제국에 버금갔고, 내수 시장과 공업력은 해상무역 국가였던 [[대영제국]]을 실질적으로는 능가했다. 게다가 독일 제국의 모체였던 프로이센의 체제를 이어받아 독일 제국 역시 군국주의 성향을 지닌 나라였다. 그래서 독일 제국의 막대한 경제 성장은 곧 적극적인 군비 증강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독일 제국이 유럽의 군사적 패권국이었던 것은 아니다. 독일 제국은 당대의 경쟁국이었던 프랑스, 영국, 러시아를 1:1로는 능가했지만, 이들이 합종연횡을 해도 독일이 우세할 정도는 아니었다.---불행히도 이건 현실로 일어난다--- 즉, 압도적인 패권국이라기보다는 아슬아슬한 1위 국가이거나 '잠재적 패권국'[* 국제정치에서 패권국이 아니지만 전쟁을 통해 패권국에 도달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국가, 내지는 현재의 패권국에 대한 가장 유력한 도전자를 의미한다.]이었다. 그래도 분명히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라고 볼 수 있었던 만큼 1차 대전에서는 상기한 세 나라를 한 국가도 빠짐없이 모두 적으로 돌려버리는 뻘짓을 하고도 미국 참전 전까지 나름 대등하게 싸웠다.[* 독일의 동맹국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이 대신 있었긴 한데 오헝제국군은 본질적인 구조의 문제 덕분에 전쟁의 시작이던 세르비아 침공 때부터 삐걱대며 도움은 커녕 삽질만 계속해서 독일제국군 수뇌부를 경악케할 정도였고 오스만 제국도 갈리폴리 전투에선 잘 싸웠지만 러시아 제국군의 남하에 조지아-캅카스 전선에서 연패해 본진 아나톨리아 반도까지 밀렸다. 그리고 애당초 이 두 나라는 덩치만 어느 정도 컸지 그 외에 분야들에선 영프러에 비견될 국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오헝제국을 동맹국으로 둔 덕분에 이탈리아가 협상국에 참전해버린 것은 덤. 이 정도면 이런 나라들을 동맹국으로 두고 사실상 전세계와 전쟁을 한 독일이 대단해 보일 지경이다.] 독일 제국군은 단순히 국방만 담당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영향력도 막강했다. 이는 문화적으로는 프로이센에서 기원한 군국주의를 독일 제국이 그대로 계승했고, 정치적으로는 독일이 입헌 공화정, 군주정, 군부통치가 혼합된 기묘한 체제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독일은 정치적으로 행정부나 의회가 군대를 통제할 방법이 없었다. 독일 통일 이전에 비스마르크가 국방 예산을 놓고 의회와 사사건건 대립했던 바에서 보이듯이, [[독일 제국군]]은 민간에 재정을 의존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군대를 통제할 수단을 명시한 법이 독일에는 없었고, 군대의 통수권은 [[왕권신수설]]에 기반하여 황제가 독점했다. 그래서 독일 제국군은 분명 국가의 재정에 의존하지만 국가의 통제는 받지 않는 초법적 지위를 손에 넣었다. 게다가 황제의 통수권에 대한 규정도 명확히 성문화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딱히 황제라고 군대를 확실하게 휘어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1차 대전 즈음에는 군대가 황제를 쥐고 흔드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러한 [[앙시앵 레짐|구체제]]적이고 반동적인 군부의 모습을 견제하려는 시민 사회의 노력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독일 제국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3차례의 전쟁을 승리하는 과정에서, 독일 제국군은 [[애국심]]의 상징으로 그 이미지를 크게 탈바꿈하게 된다. 군대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는 (그 묘사가 얼마나 사소한 것일지라도) 비애국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짙게 형성되었고, 의회 내 자유주의 세력의 훼방에도 불구하고 [[1900년대]]에 이르면 독일 제국군의 상비 인력은 (평시임에도 불구하고) 무려 50만 명에 근접했다.[* 재밌는 사실은 정작 군부 최상층은 이러한 인력 보강을 마뜩찮아했다는 것이다. [[융커]]를 중심으로 한 구체제 귀족층의 수는 한정될 수 밖에 없으므로, 군대의 규모를 늘리면 늘릴수록 부르주아 출신들이 군대에 들어와서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훔쳐갈 것을 우려했기 때문.] 게다가 1차대전의 전야였던 [[1910년대]]에 이르면 [[삼국 협상]]의 등장으로 인하여 독일은 [[슐리펜 계획|양면전쟁을 강요]]받는 상황에 이르렀고,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독일 군부는 규모 확장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이처럼 방대한 규모의 군대는 독일 사회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2년의 복무 기간을 통하여서 정부는 상당수의 남성들에게 (특히 독일인이라는 의식이 약했던 남/서부의 가톨릭 교도들과 노동자들에게) 국민 의식을 심어줄 수 있었다. 또한 상술했듯 고급장교의 상당수가 귀족 계층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되어 군대 자체를 선망하는 사회적인 분위기 역시 짙어졌고, 많은 부르주아 남성들에게 예비역 장교는 바람직한 사회적 지위이자 쟁취해야 할 목표물로 자리매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